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문단 편집) ==== 경제정책 ==== >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와 극단적 국가 자본주의에서 벗어나 보다 시장 지향적인 구조와 정책으로 과거와의 중대한 단절을 단행한 국가는 1970년대 후반 [[덩샤오핑]]의 중국이나 [[마가렛 대처]]의 영국, 1981년 [[로널드 레이건]]의 미국, 다른 어떠한 라틴아메리카 국가도 아니었다. 1975년 피노체트의 칠레였다. > ---- > 로버트 파켄햄과 윌리엄 라틀리프가 2007년 1월 30일에 후버 연구소에서 발표한 논문 '피노체트는 칠레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 중 [[파일:1971~2007년 칠레의 경제성장.png]] 아옌데 시기인 1971년부터 2007년까지의 칠레의 경제성장률과 다른 남아메리카 국가들의 평균 경제성장률 비교 정치적 악행과는 별개로, 집권 2년 후인 [[1975년]]에 시작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은 나름 좋은 평가를 받는다. 사실 정책 실시 전에는 아옌데 시절보다 어느 면에서는 더욱 악화되었고, 신자유주의 정책 실시 초반에는 실업률과 빈부격차가 증가하는 등의 온갖 시행착오를 겪었고 나름 적응한 후에는 경제 호황을 누렸지만, [[1982년]]에 심각한 경제 위기로 국가 부도 직전이라는 큰 위기 상황에 놓인 이후에는 이를 극복하며 오늘날 칠레의 부흥의 기반을 닦았다고 평가된다. 사실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키기 직전 칠레의 상황은 매우 처참했다. 1973년 4월 15일에 엘 테니엔테(El Teniente) 구리 광산 캠프의 노동자들은 고임금을 요구하며 76일간 파업을 했고, 동년 6월 29일에는 전술한 것처럼 쿠데타 미수 사건도 있었고, 7월 말에는 4만명의 트럭 운전사들이 37일 동안 지속된 전국적인 파업을 지속하며 교통을 마비시키고 당시 가치로만 하루에 600만 달러의 피해를 입혔으며, 쿠데타 2주 전에는 300%에 달하는 물가 상승률과 식량 부족에 대한 항의 시위가 발생하기도 했다[* 물론 이는 아옌데에 대한 미국의 방해공작의 영향이 '''매우''' 컸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정당성 없는 쿠데타로 집권한 피노체트는 정부의 정통성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국가 경제 안정에 힘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